종로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3.1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선조들의 의기와 투지를 배우다
{ 3.1운동의 흔적따라가기}보신각→보성사터→태화관터→천도교중앙대교당
올해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되는 해로 보신각에서는 4년 만에 3월 1일 정오에 3.1운동을 기리는 33회의 타종행사가 열렸다고 합니다.
[33번의 타종으로 3.1운동을 돌아본 보신각]
보신각은 3.1운동의 중심지로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이기도 합니다.보신각을 지나서 근처 보성사터로 갑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곳이 보성사였고, 당시 보성사 이정일 사장이 이를 주도했습니다.
[1999년 보성사 터에 기념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정일은 이 보성사에서 한밤중에 3만 5천 부의 독립선언문을 몰래 인쇄해 리어카에 싣고 나가던 중 인근 파출소 순경의 불심검문을 받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숨기기 위해 위쪽에 족보인쇄물을 올려놓고 있었는데 순경이 족보 아래를 들여다보려던 바로 그 순간 가로등이 갑자기 꺼지면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인쇄하여 운반한 이 선언문은 전국 각지에 배포되어 3.1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정일 선생 동상]
이종일 선생은 62세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지만 31운동 이후 일제 탄압의 강도를 보여줍니다. 대다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와중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탄압과 박해 속에서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해방 후에도 빈곤과 고통 속에 던져졌습니다.
[옛날 보성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조계사가 있습니다]그러나 친일을 한 대다수는 탐욕스럽게 모은 부와 권력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때로는 세상에 권선징악, 사필귀정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심각하게 슬퍼집니다.[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3.1운동 당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연락했다가 스스로 체포된 33명의 민족대표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왜 민중과 함께 직접 만세를 부르지 않고 스스로 붙잡히기로 선택했느냐는 비판도 그중 하나지만 광복 전까지 33명 중 변절자는 3명뿐이라는 사실(원래 48명 중 5명)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30년 가까이 본인과 가족이 허둥대면 어떻게 될까요?) 이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 터로 갑니다. 이곳은 원래 순화궁 터로 1907년 이완용이 별장을 짓고 살다가 1918년 천둥이 치면 나갔던 곳입니다.(천벌인가요?) 당시 일류 음식점에서 요정이었던 명월관 주인 안승환이 이곳을 사서 ‘태화관’이라고 이름 짓고 명월관 별관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옛날 태화관 모습][요정으로 공연 중인 당시 기생들의 모습]안순환은 1919년 3월 1일 이곳 태화관에 민족대표 33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왠지 ‘최후의 만찬’ 그림이 떠오릅니다.[현재는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습니다]31운동 거사자금은 사실 천도교에서 부담했죠.(33명 중 천도교가 15명) 300만 명의 천도교도들이 모은 피땀 어린 헌금이 독립운동에 귀중하게 쓰인 것입니다.[정도교 중앙대교당]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광복 후 이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오셔서 ‘천도교가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3·1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이 컸던 것 같습니다.물론 33명 중 16명은 기독교인이고, 2명은 불교도로 종교를 넘어 민족 전체가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을 근간으로 한 3·1운동에 힘을 모은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아참! 천도교 4대 교주 송병희가 민족대표 33인 명단에는 없지만 34번째 대표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어서 잠깐 소개해 드릴게요.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캐나다 출신 선교사.한국 이름은 석호필.3·1운동과 제암리, 수촌리 대학살 등을 세계 최초로 사진과 글로 알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고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는다.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는 평소 뜻에 따라 1970년 사망 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그가 당시 쓴 글로 포스팅을 끝낼까 해요. 10년간 입을 다문 채 살아온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과 생명까지도 내놓고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자유를 위한 큰 함성을 질렀다. 아, 1919년 3월 1일에 울렸던 그 함성이라니! 한국인들이 만세! 한국이여 영원히!라고 외쳤고, 나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우리도 그날의 함성뿐만 아니라 그 함성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그 환호성을 짓밟은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는 사람, 잘못을 알지만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잘못을 인정하지만 스스로 마음대로 용서한 사람, 피해자를 대신해 함부로 용서하려는 뻔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셀프용서라는것은없고진심으로사과하고죄의대가를받은후피해자가용서해야허락을받을수있는것이다.{기타 종로 3.1운동 관련 장소}▷ 수운회관: 독립선언서선에서 (안국역근처) ▷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운동 시작지(종로3가역) ▷ 종로YMCA: 학생단독립운동거점(종각역) ▷ 승동교회: 학생들의 3.1운동준비처 ▷ 중앙고등학교: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3.1운동을 계획한 곳(북촌) 등…▷ 수운회관: 독립선언서선에서 (안국역근처) ▷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운동 시작지(종로3가역) ▷ 종로YMCA: 학생단독립운동거점(종각역) ▷ 승동교회: 학생들의 3.1운동준비처 ▷ 중앙고등학교: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3.1운동을 계획한 곳(북촌) 등…▷ 수운회관: 독립선언서선에서 (안국역근처) ▷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운동 시작지(종로3가역) ▷ 종로YMCA: 학생단독립운동거점(종각역) ▷ 승동교회: 학생들의 3.1운동준비처 ▷ 중앙고등학교: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3.1운동을 계획한 곳(북촌) 등…